슬로프가 조용해진 이유 — 한국 스키장, 무엇이 달라졌나
by SuSu Daddy어릴 때 처음 스키를 탄 곳은 용평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부모님 손을 잡고 올라간 슬로프는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스키장답게 용평은 당시 겨울 레저의 중심이었고, 그 설렘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스키장은 조금 다른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슬로프가 왜 예전 같지 않은지, 개인적인 경험과 데이터를 함께 꺼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 하이원에서 시작된 스노우보드
2006년 강원랜드가 폐광 지역 활성화를 위해 하이원리조트를 정식 개장했습니다. 처음 골프장으로 문을 열었다가, 그해 겨울 스키장과 콘도를 함께 열면서 본격적인 리조트로 거듭났습니다. 저에게 하이원은 스노우보드를 처음 접하게 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스키만 알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하이원에 갔다가 난생처음 보드를 빌려 탔습니다. 처음엔 엉덩방아를 수도 없이 찧었지만, 그 감각이 너무 좋아서 그 시즌만큼은 거의 매달 슬로프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 2010년대, 휘닉스파크 황금기
취업 후에는 주로 휘닉스파크를 찾게 되었습니다. 1995년 개장한 이 리조트는 평창에 자리 잡고 있어 서울에서의 접근성이 좋았고, 보드 문화가 활발하게 자리 잡은 곳이었습니다. 2010년대 중반, 시즌권을 끊고 주말마다 내려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시절이 아마 한국 스노우보드의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07년 무렵에는 슬로프에서 스키어보다 스노우보더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비율이 역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게 수치로 느껴진 게 아니라, 리프트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면 옆에 보드를 든 사람이 훨씬 많았다는 기억에서 먼저 실감했습니다.

□ 11월 개장의 설렘
그 시절 용평과 휘닉스파크 사이에는 독특한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개장 경쟁이었습니다. 두 리조트가 먼저 오픈하려고 제설 작업에 열을 올렸고, 11월 초에 개장 소식이 뜨면 시즌권을 가진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슬로프를 향했습니다.
11월에 첫 보드를 탄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였습니다. 눈이 많지 않아 슬로프 폭이 좁아도, 기다리던 계절이 드디어 왔다는 느낌에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 경쟁적인 개장 문화가 겨울 스포츠 시즌을 더 일찍, 더 뜨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 슬로프가 조용해졌다
지금은 그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한국 스키·스노우보드 방문객 수는 20112012 시즌에 686만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이후 꾸준히 줄어들었고, 20232024 시즌에는 443만 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코로나 이전 수준은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전성기 대비로는 약 65% 수준에 불과합니다.
코로나 시기였던 20202021 시즌에는 약 145146만 명까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예외적 상황이었지만, 그 이후로 완전한 회복 없이 정체 국면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슬로프에서 몸으로 느끼는 변화는 더욱 직관적입니다. 예전에는 리프트를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것이 당연했는데, 요즘은 그런 광경이 성수기에도 줄어들었습니다.

□ 시즌권도 달라졌다
예전에 시즌권을 구매하면 버스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서울 출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별도로 교통비를 계산할 필요가 없었고, 그게 스키장을 더 자주 찾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시즌권과 버스 비용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별도로 예약하고 결제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전체 비용 구조가 달라졌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접근 장벽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방문 빈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 왜 줄어들고 있을까
방문객 감소에는 여러 원인이 겹쳐 있습니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가장 눈에 띕니다. 과거 스키장의 평균 운영 일수는 약 120일이었지만, 최근에는 80~100일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예전에 11월 초에 열리던 개장이 이제는 12월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온 상승으로 인공 제설에 들어가는 전력과 용수 비용은 늘어나는데, 정작 매출은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비용 문제도 있습니다. 장비 렌탈, 리프트 이용권, 식음료, 교통비까지 하루 스키장 비용은 상당합니다. 인구 구조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0~90년대생이 스키·스노우보드 문화를 이끌었다면, 젊은 세대는 겨울 스포츠보다 다양한 실내 활동이나 해외여행 쪽으로 관심이 분산되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세대 중에서도 슬로프 대신 다른 취미를 택한 이들이 꽤 많습니다.

□ 마무리
그래도 슬로프의 감각은 여전히 특별합니다. 아침 첫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설면을 내려오는 느낌은, 어디서도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방문객이 줄었다고 해서 그 매력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다만 예전만큼의 열기가 돌아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개장일이 늦어지고, 비용이 오르고, 인구가 바뀌는 흐름 속에서 한국 스키장 문화는 천천히 재편되고 있습니다. 저처럼 슬로프에서 겨울을 보내던 세대의 경험담이 언젠가 추억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요즘 가끔 합니다.
그래도 올 겨울엔 한 번 더 나가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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